가을 산책

  날씨가 너무 좋아 밖에서 걷고 싶었다. 아파트 8층까지 올라오는 은목서 향기에 매혹되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에서 <가을 아침>이 흘러나온다.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가을 아침>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기로 마음먹으며 걸어간다.








  집 앞의 초등학교가 보인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축구하는 소리로 시끌시끌했던 운동장이다. 배우 없는 무대는 황량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가본 것이 언제적이었나. 아마 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마지막이었을 거다. 깔끔하고 밝은 색으로 칠해진 교실, 경쾌한 음표같은 아이들. 문득 내게도 초등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이 그립다는 이야기와는 다른 말이다.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 아래서 땅속으로 기어든 냇물도 가을의 선선한 공기에 소생하여 흐른다. 여름의 태양은 단순히 내리쬐지 않는다. 그것은 작열하며 지상의 모든 존재를 지표면으로 납작하게 내리누른다. 나는 태양의 살기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가을이다. 집에서 창문을 열어두면 찬 바람이 불지만 밖으로 나가면 따스한 태양의 온기가 있는 가을이다.   





  나는 비행기를 보는 것이 좋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 위 작은 점처럼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는 것도 좋고 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육중한 몸체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나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공군교육사령부의 비행기 모형을 보러 간다. 이곳은 나의 비밀 장소다. 여기는 워낙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누운 채로 비행기 모형을 올려다 보기도 한다. 나는 차가운 돌바닥이 더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누워있곤 한다. 








  철조망 너머로 진짜 비행기인 것같은 몸체가 보인다. 정문 위에는 맹렬한 기세의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다. 그 뒤에는 '젊음을 조국과 하늘에' 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다. 문득 사관학교, 특히 공군에 품어왔던 마음이 꿈틀거린다. 나는 이루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군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알 수 없는 뇌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기도 하고, 소아과 의사가 되어 아픈 아이들과 함께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가장 바라왔던 길이었던 공대생의 진로는 내 마음에 없다. 어떤 불씨를 지필 수도 없고 그저 감내하며 살아가는 짐이자 굴레가 되었다. 나의 길을 사랑할 수 없어 슬프다.








   




  아파트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고즈넉한 시골마을이 나온다는 게 나는 아직도 신기하다. 신호등도 없고, 차도 가운데서 유유히 걷는 것도 가능하다. 대문 틈으로 고무 호스를 끌어다 빨간 다라이를 씻는 모습도 보이고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설까말까한 버스 정류장도 있다.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정자도 보인다. 역시 이 마을에도 정자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 된 듯한 공간에 이질적이게도 양파들이 나뒹굴며 싹을 틔우는 모습은 내게 어떤 현대 미술 작품보다 예술적인 조형물로 보인다.




  길을 잃어 어쩔 수 없이 차도의 바리케이드를 넘어간다. 거미줄을 가로질러 간 듯하다. 그러나 경사가 급해 신경쓸 수 없다. 내가 아는 곳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옷에 엉겨붙은 거미줄과 벌레의 사체가 눈에 띈다. 거미줄을 끊은 죄다. 눈을 애써 돌린 채로 집에 와서 벌레를 떼어내는 것으로 오늘의 산책을 마무리하였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내 방 환골탈태 프로젝트 - 마지막날

투페이스드 본라이크 디스 팔레트

오늘의 교훈: 미리미리 준비하면 복이 온다_D-11(202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