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 때 혼자 걷는 즐거움에 눈뜨게 되었다. 혼자 걸으면 사색을 즐길 수도 있고, 사실 혼자 걷는 것은 나와 함께 걷는 일이기 때문에 전혀 외롭지도 않았다. 가장 평범한 것들이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혼자 걷기였다. 점심 시간이면 학교 화단 근처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정 답답할 때는 주말 점심 시간에 몰래 힐튼 호텔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냥 슬리퍼를 손에 들고 양말만 신은 채로 길의 감촉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 가장 자유로워졌다.
고 3이 끝나고 혼자 서울 여행을 갔다. 할머니 집에서 머문 탓에 여행 치고는 정말 불편 없이 지냈다. 나는 매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일기장에 쓰고 백팩을 매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매일매일 새로운 곳을 마음껏 걸었고, 중간에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즉흥적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다른 누구와도 타협할 필요가 없었고, 나는 내가 느끼고 싶은 방식으로 느끼고 싶은 만큼 그날의 여행지에 온전히 몰입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서울 시립 미술관에 들어가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 앞에서 그 작품을 눈 안에 담아버리고 말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몇 분간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금 지치면 서울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척하며 도서관을 가득 채운 책과 책을 읽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여행을 했고, 나는 그런 작고 소소한 여행들이 참 좋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방에서 사이버 강의를 들으며 과제만 하니 참 무료했고, 나의 방랑벽이 답답한 내 마음을 살살 긁었다. 그래서 작고 지루한 지방 도시인 이곳에서도 행복을 찾는 작은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은 어제 점심 즈음에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어제 오후에 선언했으며, 오늘 점심에 떠났다.
오늘의 여행지는 내가 진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진주문고였다. 진주 문고에 가는 것은 몇 가지 필수 행위가 덧붙여진 세트 메뉴이다. 우선 김밥천국에서 조미료 맛이 가득한 김치찌개나 순두부찌개를 먹어야 하고, 진주 커피에서 조금 싱거운 카페라떼와 밋밋한 베이비 스콘을 먹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진주 문고 3층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북캉스를 즐길 수 있다.
집에 김치가 없어 김치 찌개가 고픈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메뉴는 김치찌개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치찌개가 뚝배기에 담은 김칫국처럼 부실하게 나왔기 때문에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은 찍지 않았다.
베이비 스콘은 5개에 2500원이고 카페라떼는 4000원이다.
위에 커피는 싱겁고 스콘은 밋밋하다고 했는데, 여기 오면 그냥 먹게 된다.
오늘 먹어보니 베이비 스콘의 맛이 전보다 나아져서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2시에 바라본 진주 커피 창 밖.
일부러 레트로처럼 꾸미지는 않았지만 예스러운 느낌을 주는 편안한 인테리어와
약간은 어설픈 맛의 커피와 스콘,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책, 책, 책.
책방과 잘 어울리는 카페다.
오늘 와서 보니 1층의 어중간했던 공간이 근사한 전시실로 바뀌었다.
35년을 진주와 함께해온 책방인만큼, 전시도 지역 작가들의 작품 전시였다.
오늘도 나는 마음에 드는 그림 하나 앞에서 그 그림을 눈에 다 담아버릴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붓터치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피며
색채가 뒤섞인 채 굳은 유화 물감 덩어리를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다.
방명록도 있길래 내가 왔다 간 흔적을 남기고 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기억>을 전시해두었는데,
표지가 초현실적이면서도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 렌티큘러 표지라
내용에 관계없이 너무 사고 싶었다.
기억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기억'은 내가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에 더 사고 싶었다.
정말 등대처럼 생긴 이 작은 방은 고전 문학 혹은 현대 문학 전집들로 사방이 가득하다.
그래서 들어서면 책 냄새에 둘러싸일 수 있다.
나는 문학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 책들을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도서관과 큰 책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이 있어 둘 다 방문하는 즐거움이 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는 주로 내가 '아는 책' 안에서 책을 고르고, 책방에 가서는 '아는 책'의 범위를 넓힌다. 서점은 기본적으로 책을 판매하는 곳이기 때문에 새로 출판된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이것저것 권해주는데, 진주문고는 미술품을 큐레이팅하듯 책을 전시해놓기에 전시된 책들은 마치 만져도 되는 작품처럼 매력적이다.
내가 서점에 가면 또 하는 짓이, 평소에는 절대 안 읽을 책을 읽는 것이다. 평소에도 라이트 노벨이나 가벼운 에세이는 거의 읽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더라도 가치있는 책을 읽자라는 내면의 압박이 존재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걸 알고부터는 야채를 즐겨 먹던 사람이 어느날 '나는 다이어트 식단만 먹어야 해!'라는 생각을 하고, 이상하게 그날 이후 야채를 먹는 것에 조금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내게 책이 숨쉬는 '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항상 하던 것인데 항상 해야하는 것으로 미묘하게 인식이 바뀌었달까?
도서관에서는 내가 평소에 읽어야지라고 생각해뒀던 책들, 주로 명저를 읽고 대출한다. 그렇지만 서점에서는 이책 저책 기웃거리고, 소규모 출판사에서 펴낸 가벼운 에세이들, 그냥 글을 쓰고 싶어서 일기 쓰듯 마음대로 쓴 것 같은 책을 읽는다. 그러면 주말 오전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처럼 생산적이지는 않아도 푹 쉰 것같은 기분이 든다. 또, 이런 책들은 작정하고 읽는 게 아니라서 읽다가 덮고 나와도 아쉬운 마음이 덜해 책방을 나서는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두지 않는다. '그냥 읽을 때 맘 편히 읽다 편한 마음으로 덮고 가세요'라고 말하는 것같은 가벼운 마음을 가진 책이다.
도서관의 너덜너덜한 책장을 무심히 넘기는 것도, 책방의 새 책을 조심조심 넘기는 것도 상반된 재미다. 찾던 책이 대출 중이라 잠시 짜증이 치밀지만 이내 다른 책을 대출하고 마는 곳이 도서관이고,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읽고 싶은 책을 찾아오는 곳이 서점이다. 한가롭게 책과 문화를 즐기다 6시 반쯤 나오니 벌써 날이 저물었다. 해가 짧아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버스에 타서 창밖 풍경을 넋 놓고 보다보니 벌써 집 앞이었다. 진주문고를 나오면서 찍은 진주 문고 층별 안내판 사진으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