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고 홈커밍 - 어린왕자, 선생님들, 잘 살았다는 것

 원래는 저번 주에 가기로 했던 해성고에 갔다. 피자, 아이스크림, 옥수수 찐빵을 바리바리 사 들고 갔다. 수능이 200일 남았을 때 교감 선생님께서 옥수수 찐빵을 사 오셔서 고 3 전체에 돌리셨는데, 그때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 학교에 올 때 선생님들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다가 결국 옥수수 찐빵을 사 가기로 했다. 특히 전국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롤케익, 비타500과는 달리 이 찐빵은 남해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므로. 원래는 4시 반 전에는 도착해서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피자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고 하다보니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본관 교무실, 3학년 교무실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나름의 추억이 있는 옥수수 찐빵. 따뜻하게 먹어도 맛있고 차갑게 해서 먹어도 쫀득하고 맛있다.)


 전국 곳곳에 코로나로 인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지만 이 고즈넉한 시골 학교는 다들 마스크만 썼을 뿐, 여전히 조용하고 소담스러웠다. 모든 분위기가 그대로였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저녁을 먹으러 고3 계단을 내려오는 3학년들, 그런 아이들을 챙기는 선생님들, 윗 운동장을 도는 학생들, 아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좀 더 여유롭게 지난 날의 흔적을 곱씹으며 교정을 걸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선생님들이 퇴근하실 시간이었기 때문에 꼭 뵙고 싶은 분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신현욱 선생님과 하상운 선생님은 뵐 수 있었다. 물리를 신현욱 선생님께 배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나는 신현욱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대학이 사이버 강의를 하는 동안 나온 과제들도 많이 여쭤봤다. 하상운 선생님은 내 3년 담임 선생님이시다. 2학년 말에 선생님께 제발 3학년 때 저 좀 데려가 달라고 졸랐던 게 생각난다. 올해도 선생님은 고 3 담임을 맡으셨는데, 요즘 학생부 마감에 수시 원서 일정까지 겹쳐 너무 피곤해보이셨다.


(왼쪽이 하상운 선생님, 오른쪽이 신현욱 선생님께 드린 아크릴램프. 하상운 선생님은 워낙 마블, 특히 아이언맨을 좋아하셔서 아이언맨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가디언즈 오브 케미스트리'로 패러디한 것을 새겼다. 신현욱 선생님은 물리 가르치는 것 외에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찍어주던 모습이 가장 많이 생각나서 선생님이 사진 찍는 모습을 새겼다.)


 동하 쌤을 2주만에 다시 뵙고, 간만에 즐거운 홈커밍 멘토링을 즐겼다. 해성고의 가족이자 내 고등학교 생활에서 행복의 절반 이상이었던 어린왕자.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멘토링 결연식을 한 3년 전의 3월 15일부터 졸업식에서 멘토링끼리 사진을 찍으며 작별 인사를 했던 날, 그리고 그 이후의 나날들까지 어린왕자는 내 마음에 깊이 자리잡아버린 존재다. 멘토링을 할 때마다 입이 열 개라도 달린 것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멘티를 멘티라는 이유만으로 아껴주고...다 '어린왕자'가 바꾼 내 모습이다. 

 첫 멘토링 후배 멘티였던 준혁이는 벌써 3학년이 돼서 내가 작년에 했던 고민들을 하고 있었고, 내가 3학년이었을 때 아직 어린 1학년이었던 예린이, 혜정이, 욱진이는 벌써 학교의 중심 학년인 2학년이 되어 교내 활동을 주도하고, 본격적으로 진로를 정해 바쁘게 공부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본 1학년 아이들은 4명이었는데, 학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앳된 1학년다운 모습이라 귀여웠다. 멘토링 만났을 때 사진을 안 찍은 게 너무 후회된다. 

 동생이 이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잠깐 만나서 옥수수 찐빵을 줬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는 사이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더 밝은 모습으로 대해줘서 좋았다. 학교 떠나기 전에 인사할 때는 먼저 '빠이~'라고 조금 웃으면서 인사해줘서 놀라기도 했고 정말 고마웠다.

 


 학교를 떠나기 전 찍은 사진이다. 하늘이 어둑해지면 교실의 불은 더 밝아지고,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자기 공부를 한다. 기숙사 1층은 리모델링을 하여 수월성 수업을 할 수 있는 교실로, 북카페로, 학습 공간으로 바뀌었다. 빨간 전광판 시계를 보며 매점에서 뛰어왔던 것도, 학교에서 애지중지 기르는 잔디도, 처음 학교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소나무도 그대로이다. 여기도 변한 것과 그대로인 것이 잘 어울려 있다. 

 나를 아껴주셨던 영양사 이모와 매점 이모를 뵙고 가려 했는데 벌써 급식소와 매점 문이 닫혀있었다. 2, 3학년 때 급식소와 매점 관련 업무를 하면서 두 분의 고충을 들어드리기도 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해드리기도 하고, 그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영양사 분은 그런 상담을 할 때마다 자두나 요구르트를 하나씩 쥐어주셨고, 매점 이모는 간식거리를 챙겨주시고 수능 날에는 큼지막한 허쉬 초콜릿까지 챙겨주셨다. 

 매점 이모라도 뵙기 위해 마을로 올라가는데, 마침 얼마 안 가서 이모를 뵈었다. 이모께도 옥수수 찐빵을 드렸는데, 너무 좋아하시면서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초코우유, 마이구미, 박카스 등을 챙겨주셔서 나는 고 3 때처럼 감사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유독 할머니들이 주시는 정을 좋아하는데, 해성고에서는 매점 이모가 친할머니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엄마는 내가 이런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너가 고등학교 때 잘 살았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반겨주고, 잘 되면 남들도 기뻐해주는 것. 그게 잘 살았다는 증거인가보다 생각했다.



(매점 이모가 챙겨주신 간식거리들. 오늘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해성고로 들어오는 비탈길. 고등학생 때는 여기서 밖을 바라보며 학교 탈출 계획을 세우곤 했다.)


(올해 새로 생긴 학교 현판. 리조트 느낌이 나기도 하는데, 생기니 고급스러워 보이고 좋다.)


 남해에 왔으니 저녁은 바른 짬뽕에서 먹었다. 팔이 아픈데도 오늘 나를 위해 수고해주신 엄마를 위해 내가 한 턱 냈다. 지난 번에는 그냥 바른 짬뽕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눈물 짬뽕을 먹었다. 오늘도 역시 맛있었다.


(왼쪽이 바른 짬뽕, 오른쪽이 눈물 짬뽕 1단계. 나는 눈물 짬뽕 1단계가 더 맛있었다.)



(오늘도 먹은 마성의 탕수육. 정말 전국에서 탕수육 제일 잘하는 집은 여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성고를 다시 한번 스쳐지나갔는데, 빗물 맺힌 창문 너머로 빛나는 학교 현판이 분위기 있어 한 컷 찍었다. 정말 행복했던 오늘의 마무리는 이 사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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