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지난했던 올 여름의 마지막을 함께한 것은 복숭아였다. 그것도 4.5kg짜리 박스 안에 9개 든, 아주 큼직하고 탐스러운 복숭아. 집 떠나면 제일 먹기 힘든 게 과일인데, 대학에 한 달 반 남짓 머무르면서 과일에 대한 갈망은 나를 괴롭혔다. 사실 고등학교도 기숙사라 집 떠나 있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영양가 있는 급식과,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먹을 것이 한가득한 택배와, 야자 시간에 출출한 학생들을 위한 야식을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생활은 결코 집을 떠난 생활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과일을 정말 많이 먹는다. 그래서 제철 과일이 늘 냉장고를 채우고, 거의 매 끼니마다 디저트로 과일을 챙겨먹는다. 그런데 나도 집을 떠나고, 동생도 나의 모교로 떠나면서 부모님도 과일을 잘 사놓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년도에 거의 전면 비대면 수업을 한 덕에, 집에 있으면서 집 떠나면 먹기 어려운 과일을 원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집 냉장고 안에도 제철 과일이 늘 자리하게 되었다. 

 올해는 특히 복숭아를 많이 먹었는데, 2주일만에 5박스를 먹은 것 같다. 복숭아는 나오는 시기도 짧고, 가격도 저렴하지 않은 귀한 과일인데, 복숭아를 이렇게까지나 많이 먹게된 계기는 생각보다 별 게 아니다. 작은 아빠 아시는 분이 복숭아 농사를 한다고 하셔서 전화로 '복숭아 먹고 싶어요~'라고 한 마디 했더니 작은 아빠가 조카의 소원을 쿨하게 들어주셔서 이틀 후에 복숭아 두 박스를 받았다. 

 그런데 이 복숭아가 예사 복숭아가 아니었다. 위에서 쓴 것처럼 9개에 4.5kg나 하는 슈퍼 복숭아였다. 크기도, 빛깔도 뺨이 발그레한 아기의 얼굴같은 복숭아였다. 그 전까지만해도 나는 물렁한 황도보다는 딱딱한 백도를 선호했으나, 이 복숭아를 하나 맛본 후에는 취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과즙이 한가득 흘러나오면서도 아작아작한 식감이 살아있었고, 달콤함이 입 안을 사로잡으면서도 끈적함이 아닌 복숭아 특유의 향긋함이 입 안을 맴돌았다. 나는 이 복숭아를 맛보고 많고 많은 과일 중 왜 신선은 '복숭아'를 먹었는지를 알 듯했고, 엄마는 복숭아 통조림을 만든 사람이 이런 복숭아의 맛을 좇으려 얼마나 노력했을지 상상이 된다고 했다. 



 참 예쁜 복숭아. 보솜보솜한 솜털이 아기 얼굴처럼 돋아있고, 따스한 햇살을 닮은 색이다. 물방울이 맺혀있는 모습은 이 녀석을 더욱 싱싱하고 탐스러워보이게 한다. 올 여름에 <그해 여름 손님>, 그러니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 소설을 읽었는데, 싱싱하고 아름다운 엘리오를 상징하는 소재 중 하나가 복숭아였음을 떠올리면서 참 잘 어울리는 상징이라 생각했다. 




 복숭아가 너무 예뻐서 계속 찍게 되었다. 복숭아를 바라보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는데, 아이유가 설리를 생각하며 '복숭아'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러면서 아이유가 설리를 참 예쁜 눈으로 바라봤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복숭아를 깎은 모습이다. 우리 집은 웬만한 과일을 껍질째 먹는다. 처음에 나는 복숭아의 솜털이 주는 꺼끌꺼끌한 식감이 별로였으나, 복숭아 껍질에서 나는 향긋함때문에 그런 일말의 불쾌감도 다 잊게 되었다. 복숭아를 먹으며 '과육'이란 단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과육'이라는 단어가 주는 풍성하고도 꽉 들어찬 듯한 느낌이 이 과일의 속살을 이야기하는데 썩 잘 어울린다.



 복숭아는 우리 가족 모두가 즐기는 과일이다. 토토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 과육이 많이 붙어있는 씨앗을 토토에게 주면 토토는 그것이 갈비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물어뜯는다. 앙상한 씨앗만 남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건 남김없이 먹고, 남은 복숭아 씨앗은 가끔 툭툭 건드리며 논다. 그러다보면 토토의 밥그릇에는 큼직한 복숭아 씨앗이 여러 개 놓여져있다. 나는 앞으로도 복숭아 씨앗을 보면 우리 토토를 생각할 것 같다.



 

 올해, 복숭아는 나의 여름이었다. 마지막 복숭아는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는 듯 다른 복숭아들에 비해 덜 달았다. 올 여름은 너무 덥고 습했는데, 복숭아를 다 먹은 후부터는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렇게 복숭아의 철이 지남과 함께, 나의 스무 살 여름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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